
웅천에 가면 "주시철 목사 기념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기철' 이란 인물을 연상하면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성직자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오래전에 주기철 영화를 보셨다면 그 곳에 나타난 대부분의 내용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모진 고문을 당하다 끝내 숨을 거둔 장면입니다.
이 당시 대부분 기독교계는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허용하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끝까지 자기 신념을 지키고 싸웠으니 그것 자체만으로도 존경을 받아야 할 분입니다. 하지만 너무 신사참배 거부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진정한 주기철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진해 웅천에서 태어나 웅천교회를 어릴 때 다닌 관계로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고향인 진해 웅천에 세워졌습니다. 항간에는 북한에 있는 주기철 목사의 유해를 송환해 고향에 묻어야 한다는 말도 있던데, 주기철 목사 자신이 평양에 묻어달라는 유언이 있었기에 이는 합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기념관을 가보면 대부분 신사참배 거부, 신앙생활 등에 집중되어 있는데, 과연 이것만이 전부일까요?

일제시대 기독교는 독립운동사에서 상당부분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계기도 당시 교회들이 연락책이 되었기에,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계몽운동 등의 다양한 교육을 통해 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 교회였습니다. 신앙생활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때로는 민족주의자, 계몽가 등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정주의 오산학교를 졸업하였는 데, 이 당시 조만식, 이승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습니다. 이 후 안질로 인해 시력이 약화돼 고향인 웅천에 내려왔고,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당시 웅천 20인 지도부의 일원이었으니, 일제의 지명수배를 받게 되어 피하였지만 결국, 체포되었는 데, 이것이 1차로 투옥된 시기입니다. 이후 주기철은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부산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1931-1936)를 거쳐 평양 산정현 교회(1936-1944)를 시무하였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기가 바로 평양 산정현 교회의 시기입니다.
주기철 목사가 2차로 투옥된 계기가 된 사건은 바로 의성 농우회 사건입니다. 농우회는 유재기 목사가 주도적인 인물로 '예수촌' 건설을 농촌 운동의 목표로 삼고 협동조합 운동을 실천하여 자립하는 농촌 공동체를 일구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농우회는 당시 장로교 총회에서 농촌부를 폐지하여 농우회의 와해를 꾀했으며, 일제도 유재기를 비롯하여 박학전, 송영길 등과 함께 주기철 목사도 검거하였습니다. 농우회 사건은 일제가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도모한다고 의심하여 대대적으로 탄압한 사건이며, 주기철 목사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것만으로 보아 그의 사상적 특징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일제는 1935년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기독교계의 반발을 샀으나, 탄압이 지속되면서 천주교는 1936년에 감리교와 장로교는 1938년에 국민의례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주기철 목사는 이에 저항하여, 1938년 이후 네차례에 걸쳐 5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모진 고문등으로 말미암아 1944년 4월 20일 4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주기철 목사는 1939년 7월 의성 농우회사건으로 검거되어 1940년 2월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온뒤, 산정현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게됩니다. '다섯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설교로 그의 심정을 고스한히 담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한 지 이틀 후에 일제에 검거되고, 장로회로부터 목사직을 파면당했습니다. 한마디로 주기철 목사는 일제 뿐만이 아니라 그를 지켜주어야 할 예수교 장로회로부터도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의성 농우회의 협동조합운동 문제와 남들처럼 적당히 국민의례로 타협하면 되는 데, 그것을 주기철 목사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국민의례는 과연 괜찮은 것일까요. 만약 국가가 불의의 세력이라면 거기에 충성을 다한다고 맹세해도 되는 것인가요. 이 문제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독재정권 시절에 어렸을 때 부터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 등을 많이 해 오며 살아왔습니다. 이적은 정당화할 수 있는 지 의문입니다. 충성을 맹세하는 식이 국민의례가 어떤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일제시대 교회는 단순히 예배만 보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회운동과 계몽운동의 바탕이 되었기에, 그 영향력은 상당하였습니다. 왜 일제가 주기철 목사에 집착하였을까? 그것은 그 파급력 때문일 것입니다. 불의에는 절대 굽힐 수 없다는 신념,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 생활에도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민족을 사랑한 독립운동가, 예수촌 건설이라는 공동체의 농촌 건설을 꿈꿔왔던 사회운동가, 불의한 셰력에게는 국민의례라는 형식조차도 거부하여 끝까지 신앙적 양심을 지킨 순교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설교인 '다섯종목의 나의 기도'를 보면서 당시 복잡한 심정을 느껴봅니다.
주기철 목사의 다섯종목의 나의 기도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나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바로 지금 죽음 앞에 대면하고 있기에 두려움밖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죽음이 두려워 의를 버리고 죽음을 모면하여 주님을 저버리지 않게 하옵소서
두 번째 나의 기도는 이 장기간의 고통을 이기게 하옵소서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고문이라도 한두번에 끝난다면 견딜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되는 고통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나 같은 약졸이야 주님이 도와주시기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 내 늙은 어머니와 내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인정의 줄이 얽매이지 않고 기도합니다
네 번째 나의 기도는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사람이 나라의 신민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부부가 있어서는 정절의 있가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향한 순결의 의가 있습니다
다섯 번째 나의 마지막 기도는 내 영혼을 내 주님께 부탁합니다
옥중에서는 사형장에서는 이 목숨을 끊어질 때
주님,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