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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포해전, 진해 학개인가, 마산합포인가?

기사입력 2020.08.10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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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592년(선조 25) 5월 4일 처녀출전한 이순신이 원균(元均)과 합세하여 5월 7일 옥포(玉浦)에서 왜선을 무찌른 뒤에 같은 날 영등포(永登浦) 앞바다로 이동, 적을 경계하면서 휴식준비를 하던 중 와키사카(脇坂安治)가 이끄는 왜선 5척이 지나간다는 척후장(斥候將)의 급보를 받고 곧 추격작전을 벌여 합포해전이 전개되었다.

    이 때 세력이 약한 왜선들은 황급히 합포(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2동 앞바다)로 도주하여 배를 버린 채 육지로 올라가 조총으로 대응하였고, 이순신의 지시에 따른 우척후장 김완(金浣), 중위장 이순신(李純信), 중부장 어영담(魚泳譚)을 비롯한 장령들이 총통과 화살로써 5척을 모두 불태워버렸으나 왜병들은 다 잡지 못하고 밤중에 남포(藍浦) 앞바다로 이동하였다. 이 해전은 불과 5척의 왜선을 상대한 것이지만 이순신의 철저한 경계로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 왜선들이 합포, 즉 마산합포구 산호2동 앞바다로 도주하여 이루어진 이순신 장군의 해전기록인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창워문화대전을 보면 마산합포구 산호2동이 아닌 진해구 풍호동 학개로 나와 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끈 판옥선 24척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판옥선 4척이 합동으로 전투를 벌여 옥포 해전을 승리로 이끈 후 영등포 앞 바다에서 머물러 있던 중 하오 4시쯤 왜선 5척을 발견했다는 척후장의 보고에 따라 이를 쫓아가 웅천 땅 합포[현재의 진해 풍호동 학개]에 이르러 왜선 5척을 모두 분멸시킨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는 전라좌수군만이 전투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도대체 어떤 것이 사실일까? 이 논란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합포해전은 지명에 대한 3개의 주앙이 있다. 마산합포구 산호동 이라는 설, 성산구 귀산동의 두산중공업 터라는 설, 

    마지막으로 진해구 풍호동의 학개마을이라는 설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기록한 ‘임진장초’의 기록을 보면 1592년 음력 5월 7일(양력 6월16일) 오후 신시(3-5시) 영등포(거제시 장목면)에서 왜군을 추격해 웅천땅 합포에서 왜선 5척을 격침했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그러다보니 웅천이라는 지명이 있고, 이순신 함대가 오후 4시쯤 출발해서 (시속 6킬로) 해질녁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진해구 학개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에 근거하여 김태호 전 경남도지사 재임시절에 전국의 역사학자들과 경남의 시군단체장이 참여한 ‘21세기 이순신연구회’의 토론 끝에 합포해전지를 ‘진해 학개’로 정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진해에는 합포라는 지명이 없었으며, 마산에는 합포라는 지명이 있었다. 또한 진해구 학개는 ‘원포’라고 명시돼 있어 마산 합포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에 반해 진해 학개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당시 진해의 학개마을에 포구가 있었고, 이 포구를 ‘학포’라고 했을 것이기에 

    학포를 합포로 불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반대측에서는 학포와 합포는 한자상 엄연히 다르기에 논리상 맞지 않다고 맞서고 있는 것이다.

     

    이 논란이 일어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이순신 장군이 지명을 혼동하여 표기했다고 밖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마산 합포를 웅천 합포로 혼동해을 수도 있고, 진해 웅천 학개마을을 마산 합포로 혼동했을 수도 있다.

     

    또한 시간 문제이다. 당시 문헌엔 신시(오후3-5시)로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확이 몇 시에 출발했는지도 알 수 없으며, 당시 해가 가장 긴 절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신시’라는 시각의 개념도 정확히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있다. 즉, 출발 시점의 시각을 정확히 추산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학자들 나름대로의 논리가 서로 대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창원시는 진해구 학개마을에 합포해전 기념비 및 안내판을 6년전에 세웠기에 돌이키기도 어려운 처지이다.

    마산 합포라는 주장의 명백한 근거가 있어야 합포해전지가 마산 산호동이라고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미 400여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명확한 근거를 찾기란 어렵기에 기념비 장소가 변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향토문화대백과 사전은 마산 합포로 소개할 것이고, 경남을 비롯한 창원은 진해 학개로 소개할 것이다.

    앞으로도  합포해전이 벌어졌던 곳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각각의 근거에 따라 합포해전지를 추측 할 것으로 전망된다.

     



    [Daum백과] 합포해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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