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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왜성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수란’

기사입력 2020.09.07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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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웅천 왜성 표지석 -

     

    임진왜란 발발 다음해인 1593년 고니시 유키나가 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진해 웅천왜성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수란’이라는 조선인 소녀가 있었다. 일본 이름으로 ‘오타줄리아’이며 포로 상당수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 데, 그 중의 한명이다. 그녀는 ‘고니시’가 처형당한 후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인 것이 발각되어 배교할 것을 강요당했지만 거부하여 40년 유배생활 끝에 일본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일본에서는 그녀를 다룬 소설이 상당수 발간되었으며 그녀가 유배생활을 했던 ‘고즈시마’에선 1970년부터 5월에 그녀를 기리는 ‘줄리아 축제’를 하고 있다.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모리 레이코’의 소설 <삼채의 여자>에서 조선인 소녀‘수란’은 이렇게 말한다.

     

    “ 이 나라에 내가 내 발로 왔다면야 고향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무도한 싸움 때문에 붙잡혀 끌려온 희생자예요. 아무리 애정을 베풀어준다 하더라도 잡혀 온 사람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갈 날이 오지 않는 한, 이 나라는 원수의 나라일뿐이지요. 이 나라를 어떻게 고향이라 생각할 수 있겠어요.”

     

    웅천왜성은 왜성가운데 울산 ‘서생포 왜성’ 다음으로 큰 왜성이다. 해발 184m의 남산 꼭대기에 위치해 있고, 성벽 둘레 1250m에 면적 1만7930㎡이다. 웅천왜성은 안골포, 마산, 가덕도, 거제도 등과 육로와 해로 모두 연락하기 좋은 위치에 있으며, 일본으로 철수하기에도 좋은 위치이다. 왜군은 이곳을 부산 다음의 제2거점으로 삼았다

     

    이 웅천왜성에 세스페데스 신부가 1년가량 거주하였고, 이 때 왜군뿐만 아니라 조선인 포로에게도 천주교리를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웅천왜성에 대해서는 세스페데스가 일본인 포르투갈 신부인 ‘루이스 프로이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웅천성은 난공불락으로 조만간 거대한 성벽과 망루와 치성을 가진 대단한 공사가 마무리될 것입니다. 이 근처에는 아우구스티뉴(고니시 유키나가의 세례명) 휘하의 모든 중신과 병사, 동맹자, 종속자가 머물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매우 잘 지은 넓은 저택에서 지내고 있으며,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저택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도 잠시일 뿐 왜군은 웅천왜성에서 상당히 힘든 생활을 보냈다. 조선 수군에게 제해권을 빼앗겨 보급이 끊기다시피하여 사실상 성에 틀여박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세스페데스가 보낸 두 번째 편지에도 굶주림, 추위, 질병 등을 호소하고 있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남산을 택한 것은 지형상으로 해변에 돌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웅포만을 안고 있어 선박 수백 척이 정박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 때문이었다. 아울러 육로로도 상호 연락이 용이하고 해로도 마산, 거제, 가덕도, 안골포와 상호 연락이 용이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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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천왜성에서 바라본 바다 (신항만 매림 등으로 바다가 일부 없어짐) -

     

    일본군이 철수할 때 성에 불을 질러 내부 건물은 없어졌으나,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벽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왜성의 축성법과 규모를 엿볼 수 있다.

     

    성곽은 부분적으로 남아있고, 성벽은 대형의 면석(面石)을 상하로 고르게 쌓고 그 사이에 잡석을 채웠으며 자연석 또는 자연할석을 이용하여 잔돌끼워 난적쌓기를 하였다.

     

    임진왜란의 다급한 상황에서도 왜군들은 조선군에 대항하기 위해 수많은 현무암과 청석을 인근에서 구매했다. 놀라은 것은 이  큰 바위들을 산 위에까지 운반하여 성을 축조한 것이다. 가장 큰 바위는 1.5미터 * 1.5미터*2미터라고 하니 이 큰 바위를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조선 민초의 고충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진다.

     

    이렇게 많은 사연과 조선 민중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중요한 곳이지만, 웅천왜성을 가보면 온갖 잡초가 무성하고, 돌들도 소실된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웅천왜성을 단순히 왜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 아니라 선조들의 피눈물로 이루어진 성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보다 관리에서부터 이 왜성을 어떻게 변모시켜 활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현장을 방문하게 할지, 그리고 아픈 역사를 체허하는 산교육의 관광지로 탈바꿈시킬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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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부 무너진 성곽)

     

    자료참조 : 한겨레신문, 향토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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