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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만 알고 윤덕영은 모른다? 나라 넘긴 뒤 자작·은사금, 후손은 ‘땅찾기 소송’까지

기사입력 2026.08.17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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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병합 어전회의서 조인 적극 찬성…일제로부터 자작 작위·은사공채 5만원

    2004년 증손이 파주 임야 2,525평 반환소송…“윤덕영 후손” 다시 검색되는 이유

     

    “이완용은 아는데 윤덕영은 누구지?”

    최근 윤덕영 후손, 친일파 후손, 친일파 명단 등을 검색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윤덕영이라는 이름도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윤덕영은 단순히 일제강점기 고위 관료를 지낸 인물이 아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논의한 어전회의에서 조인을 적극적으로 가결시키는 데 참여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한일병합 때 무엇을 했나

     

    윤덕영은 1910년 당시 시종원경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그는 같은 해 8월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위한 어전회의에 참석해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압박과 회유에 동조하며 조약 체결을 적극적으로 찬성한 인물로 기록돼 있다. 이 때문에 ‘경술국적’으로 지탄받았다.

     

    국권피탈 이후 일본 정부의 대우도 뒤따랐다.

    윤덕영은 1910년 10월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고, 이듬해 1월에는 은사공채 5만원을 받았다. 이후에도 이왕직, 조선총독부 중추원, 친일단체 등에서 장기간 활동했다.

     

    이완용과는 어떤 관계였나

     

    윤덕영은 한일병합 과정에서 이완용의 합병 추진을 도운 인물로 당시 자료와 후대 기록에 등장한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사보고서를 인용한 경향신문 보도 역시 윤덕영을 한일병합 당시 시종원경으로 있으면서 이완용의 합병 작업을 도운 친일 인사로 설명했다.

     

    따라서 윤덕영은 이완용만큼 일반 대중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한일병합 과정에서 핵심적으로 움직인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순종 황후와도 가까운 집안이었다

     

    윤덕영의 동생은 윤택영이다.

    윤택영의 딸이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됐기 때문에 윤덕영은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에 해당한다. 왕실과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셈이다.

    그런 위치에 있던 인물이 한일병합 어전회의에서 조약 체결에 적극 찬성했다는 점 때문에 역사적 비판은 더욱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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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왜 ‘윤덕영 후손’이 검색될까

     

    여기서 후손 문제가 등장한다.

    2005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윤덕영의 증손이 2004년 10월 국가를 상대로 

     

    토지 반환소송을 제기했다.

     

    대상은 경기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일대 임야 6필지, 약 2,525평이었고, 당시 보도 시점에는 1심이 진행 중이었다.

     

    즉 현재 검색되는 ‘윤덕영 후손’이라는 키워드는 단순히 그의 가계가 궁금해서만은 아니라, 친일재산과 후손의 재산권 문제가 함께 얽혀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도 있다.

     

    당시 소송을 제기했다는 사실과 후손이 해당 토지를 최종적으로 되찾았다는 것은 전혀 같은 의미가 아니다. 2005년 보도는 당시 1심 진행 상황까지를 전한 것이다.

     

    특별법 제정 뒤 상황은 달라졌다

     

    친일파 후손의 재산반환 소송이 잇따르자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는 특별법이 마련됐다.

     

    국가법령정보센터에 공개된 판결에서는 윤덕영을 포함한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일제의 토지조사 과정 등을 통해 상당한 부동산을 취득했고, 상속인들의 재산환수 소송이 특별법 시행 전후로 계속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법은 러일전쟁 개전 시점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취득한 재산을 일정한 경우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으로 추정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선의의 제3자가 취득했거나 정당한 대가를 지급한 권리는 보호한다.

     

    결국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재산을 환수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재산이 언제 어떤 경위로 형성됐는지를 따지는 구조다.

     

    윤덕영은 해방을 보지 못했다

     

    윤덕영은 1873년 태어나 1940년 사망했다.

    그는 한일병합 이후에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비롯해 여러 친일 조직과 식민통치 협력 활동에 참여했고, 일본으로부터 각종 훈장과 기념장을 받았다.

    해방은 보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재산과 후손 문제는 수십 년 뒤까지 법적·사회적 논란으로 이어졌다.

     

    왜 지금 다시 윤덕영을 찾아볼까

     

    최근 친일파 명단과 후손 확인, 친일재산 환수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면서 검색도 “친일파가 누구였나”에서 “그 후손과 재산은 어떻게 됐나”로 확장되는 모습이다.

    윤덕영은 바로 이 두 문제를 동시에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에서 조약 체결에 적극 찬성했고, 이후 일본으로부터 작위와 은사공채를 받았다. 그리고 수십 년 뒤에는 후손의 토지 반환소송까지 세상에 알려졌다.

     

    따라서 윤덕영 후손이라는 검색어 뒤에는 단순한 족보의 궁금증보다는 친일행위의 대가로 형성된 재산을 후손이 어디까지 소유할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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