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의 지명 진해
진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명은 지금의 진해현이 있었는데, 그곳은 현재 마산합표구의 진동, 진전, 진북에 해당되며,
이 곳을 삼진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이곳의 지명이 갑자기 1912년에 웅천군의 관할지역이 웅서면과 웅중면(웅천 서쪽) 일부를 개편하여
진해면이라고 개편하엿는지는 정확히 알 방법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할 것입니다.
러일전쟁 승리후 일본의 해군의 기개는 하늘을 뚫을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니 일본의 해군기지에 바다를 제압하다는 이름을 사용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 뜻에 부합한 지명이 바로 진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광복 후 일본이 지은 진해라는 지명을 개명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광복후 미군정은 친일파를 등용하고, 정부수립후에도 친일파들이 나라를 다스렸으니,
진해라는 지명을 개명해야 된다고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을 것입니다.
이제 진해라는 명칭의 사용은 100년이 넘었습니다.
지금와서 명칭을 변경하는 것도 무리라고 보고,
이제는 그 명칭의 의미를 제대로 살려 아픈 역사를 조명하는 도시로 탈바꿈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입니다.
왜 일본은 해군기지를 진해로 선택했을까요.
군항의 조건으로는 수심이 깊고, 파도가 적으며, 날씨가 좋고, 수목도 많으며, 만으로 구성되어 은폐가 용이해야 합니다.
일본은 을사조약 이후 지금의 신마산(월영동) 지역을 조계지(외국인들이 자유롭게 상업을 할 수 있고,
치외법권이 인정되던 곳)로 삼고,
이 곳을 군항으로 삼을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월영동 지역은 수심이 낮아 군함의 정박에 애로점이 많았기에,
보다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더 나은 환경을 갖춘 군항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조건에 부합한 군항의 최적지가 바로 진해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해군도시인 구레도시와 유사한 환경을 갖추었고,
육로로는 장복산으로 침입이 어려웠기에 방어가 유용한 지역입니다.
이제 원래의 진해명칭인 웅천을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진해가 웅천현이었다는 것은 대부분 아실 것입니다.
1906년에 웅천군으로 개칭되었고,
현 웅천지역은 웅읍면, 웅천의 동쪽은 웅동면, 웅천의 서쪽은 웅중면, 웅서면으로 개칭되었습니다.
그리고 1912년에는 웅서면과 웅중면 일부가 개편되어 진해면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웅천이 조선시대 때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는 유적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거의 7년 가까이 웅천왜성에는 왜군이 주둔하고, 웅천읍성에는 조선이 주둔하였던 곳입니다.
지금 웅천을 가 보면 웅천읍성을 복원하고 있습니다.
(웅천읍성)
하지만 웅천왜성을 가보니 온갖 잡초가 난무하고 왜성의 돌들이 유실되고 있었습니다.
아픈 과거도 역사인데, 왜성관리는 너무나 소홀한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시에도 웅천왜성을 쌓고, 왜군이 주둔한 것을 보면,
웅천이라는 곳이 왜군의 대륙진출의 기지로 최적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입니다.
(웅천왜성)
(웅천왜성에서 본 진해 앞바다)
이토록 웅천, 진해라는 곳은 일본의 대륙진출의 최적지였으니,
일본의 침략으로 인한 조선인의 피해,
그리고 왜성축조나 일제시대에 강제노역으로 국민들이 끌려나가
엄청난 고통을 겪었던 곳입니다.
(웅천왜성의 유실된 흔적)
지금의 진해 구 시가지, 여좌동 일대의 로망스 천, 진해역, 경화역, 철로 건설, 터널공사등으로 인해
많은 선조들이 강제부역을 했던 곳이며, 진해에 일본의 해군기지가 들어섬으로
많은 진해의 원주민들이 땅을 강제로 빼앗긴 곳입니다.
이렇듯 진해라는 이름 속에는 우리 선조들의 아픔과 고통이 묻어있는 곳입니다.
이런 아픈 역사의 진해를 단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역사를 묻어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당한 고통의 역사를 보존하고, 복원하여,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고, 평화만 가득한 곳을 만들기 위한
산교육의 도시로 탈바꿈하는 것이 진정한 선조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