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뉴스목록
-
웅천왜성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수란’- 웅천 왜성 표지석 - 임진왜란 발발 다음해인 1593년 고니시 유키나가 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진해 웅천왜성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수란’이라는 조선인 소녀가 있었다. 일본 이름으로 ‘오타줄리아’이며 포로 상당수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 데, 그 중의 한명이다. 그녀는 ‘고니시’가 처형당한 후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인 것이 발각되어 배교할 것을 강요당했지만 거부하여 40년 유배생활 끝에 일본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일본에서는 그녀를 다룬 소설이 상당수 발간되었으며 그녀가 유배생활을 했던 ‘고즈시마’에선 1970년부터 5월에 그녀를 기리는 ‘줄리아 축제’를 하고 있다.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모리 레이코’의 소설 <삼채의 여자>에서 조선인 소녀‘수란’은 이렇게 말한다. “ 이 나라에 내가 내 발로 왔다면야 고향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무도한 싸움 때문에 붙잡혀 끌려온 희생자예요. 아무리 애정을 베풀어준다 하더라도 잡혀 온 사람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갈 날이 오지 않는 한, 이 나라는 원수의 나라일뿐이지요. 이 나라를 어떻게 고향이라 생각할 수 있겠어요.” 웅천왜성은 왜성가운데 울산 ‘서생포 왜성’ 다음으로 큰 왜성이다. 해발 184m의 남산 꼭대기에 위치해 있고, 성벽 둘레 1250m에 면적 1만7930㎡이다. 웅천왜성은 안골포, 마산, 가덕도, 거제도 등과 육로와 해로 모두 연락하기 좋은 위치에 있으며, 일본으로 철수하기에도 좋은 위치이다. 왜군은 이곳을 부산 다음의 제2거점으로 삼았다 이 웅천왜성에 세스페데스 신부가 1년가량 거주하였고, 이 때 왜군뿐만 아니라 조선인 포로에게도 천주교리를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웅천왜성에 대해서는 세스페데스가 일본인 포르투갈 신부인 ‘루이스 프로이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웅천성은 난공불락으로 조만간 거대한 성벽과 망루와 치성을 가진 대단한 공사가 마무리될 것입니다. 이 근처에는 아우구스티뉴(고니시 유키나가의 세례명) 휘하의 모든 중신과 병사, 동맹자, 종속자가 머물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매우 잘 지은 넓은 저택에서 지내고 있으며,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저택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도 잠시일 뿐 왜군은 웅천왜성에서 상당히 힘든 생활을 보냈다. 조선 수군에게 제해권을 빼앗겨 보급이 끊기다시피하여 사실상 성에 틀여박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세스페데스가 보낸 두 번째 편지에도 굶주림, 추위, 질병 등을 호소하고 있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남산을 택한 것은 지형상으로 해변에 돌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웅포만을 안고 있어 선박 수백 척이 정박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 때문이었다. 아울러 육로로도 상호 연락이 용이하고 해로도 마산, 거제, 가덕도, 안골포와 상호 연락이 용이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웅천왜성에서 바라본 바다 (신항만 매림 등으로 바다가 일부 없어짐) - 일본군이 철수할 때 성에 불을 질러 내부 건물은 없어졌으나,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벽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왜성의 축성법과 규모를 엿볼 수 있다. 성곽은 부분적으로 남아있고, 성벽은 대형의 면석(面石)을 상하로 고르게 쌓고 그 사이에 잡석을 채웠으며 자연석 또는 자연할석을 이용하여 잔돌끼워 난적쌓기를 하였다. 임진왜란의 다급한 상황에서도 왜군들은 조선군에 대항하기 위해 수많은 현무암과 청석을 인근에서 구매했다. 놀라은 것은 이 큰 바위들을 산 위에까지 운반하여 성을 축조한 것이다. 가장 큰 바위는 1.5미터 * 1.5미터*2미터라고 하니 이 큰 바위를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조선 민초의 고충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진다. 이렇게 많은 사연과 조선 민중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중요한 곳이지만, 웅천왜성을 가보면 온갖 잡초가 무성하고, 돌들도 소실된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웅천왜성을 단순히 왜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 아니라 선조들의 피눈물로 이루어진 성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보다 관리에서부터 이 왜성을 어떻게 변모시켜 활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현장을 방문하게 할지, 그리고 아픈 역사를 체허하는 산교육의 관광지로 탈바꿈시킬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 일부 무너진 성곽) 자료참조 : 한겨레신문, 향토문화대사전 등
-
경화동 조천마을의 덕주공원경화동 두산위브 아파트와 경화역 사이에 덕주 공원이 있습니다. 또한 경화동 조천마을 뒤편의 장복산에는 덕주봉이 보입니다. 진해에 살면서도 이 공원과 봉우리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지나가면서 무슨 공원정도 있는 것으로 아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덕주공원은 2011년 경화동으뜸마을만들기추진위원회가 경화동 조천마을에서 출생한 김덕주 이인(異人)을 기려 지역주민들의 자긍심과 애향심을 고취하고자 만들었으며, 2017년 경화동 두산위브아파트가 기부체납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보강해 세워젔습니다. 김덕주는 일제강점기 때의 실존인물로 축지법과 예언하는 능력까지 갖추었다하여 그를 지역 사람들이 '이인'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김덕주에 관한 것은 '진해의 땅이름이야기(2000)'란 책에 2페이지 가량 나오는데, 이 자료는 경화동에 사는 김재석 씨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2009년에 기본내용은 비슷하나 약간의 다른 각도로 서술한 '진해스토리"란 책이 있을 뿐입니다. 이 책들은 김덕주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경화동 제피네 조천마을에 '김씨'이고 '덕주' 또는 '덕조'로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초인적인 힘과 축지법, 미래를 예언하는 힘도 갖추고 있어 사람들은 그를 '이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장복산 꼭대기에 있는 바위들을 붙여서 지은 바위집에서 살고 있었는 데, 직접 이 바위들을 짊어지고 날라서 지었다. 출입문은 통으로 된 바위 한개로 되어 있어 보통 사람은 도저히 문을 열수 없었다. 이 집을 '덕주바위'라고 불렀으며, 일본인들은 '선인굴'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풍화 등으로 인해 소실되어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그 곳으로부터 서남쪽으로 200미터 지점에 그가 사용하던 덕주샘이라는 우물이 있다. 이 곳은 높은 산 바위틈에서 사철 변함없이 물이 흘러내려 사람들이 이곳을 신성히 요기고 촛불을 켜 고사를 지내는 사람도 있었다. 평소 그의 머리카락은 자라나는 대로 두어서 치렁치렁했기 때문에 지금도 머리를 단정히 하지 않는 사람을 덕주머리 같다고 한다. 그는 장차 난리가 나면 양식으로 하겠다고 하면서 비지나 엿 찌꺼기를 모으기도 하고 술지게미나 솔잎을 주식으로 삼았다. 밥이 먹고 싶을 때는 제피내에 사는 친척집에 찾아가서 얻어 먹었다. 그의 에언은 실제로 맞았으며 그 가운데 후세까지 전해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흰 다리가 오면 나라가 망한다' 이 예언은 일본해군육전대가 진해에 군항을 설치하려고 측량을 하러 올 때 흰 행건을 두르고 온것을 예언. 둘째, '한일거리에 큰 도시가 생길 것이다' 이 예언은 한일거리리가 도시계획으로 경화동이란 직각형 도시가 만들어질 것을 예언. 세째, '5일장이 옮겨올 것이다' 이 예언은 풍호동 풍덕개장이 일본 해군의 비행장 건설로 경화동으로 옮겨 올 것을 예언 넷째, '웅동에서 뱀들이 꼬리를 물고 몰려올 것이다' 이 예언은 웅동 아홉냇골의 끝줄기가 되는 심동, 평창 등의 마을 일대가 수언지가 되어 그 먼 곳에서부터 물을 끌어 올 송수관이 부설될 것을 예언 다섯째, '병똥같은 집에 살게 되면 세상 다 된줄 알라' 아마도 이 예언은 오늘날 아파트를 뜻하여 주택난 시대가 오면 인심이 각박해질 것을 예언 이인 김덕주는 일본헌병의 불심검문을 받고, 불응하여 달아나다 일본이 장목산까지 수색을 하러오는 것을 보고 김해 장유면으로 피신한 후 아무도 그의 행적을 알수 없다고 한다. 오늘날 산악인들이 김덕주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기념하는 의미해서 장복산에 '덕주봉'이라는 표것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에 나오는 것들은 덕주 공원에 팻말이나 조형물 등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특히 '덕주토우상'은 주민들이 직접 황토를 빚어 만든 것이라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이외에 '경화동으뜸마을만들기추진위원회'는 2013년에 이인의 전설을 담은 "덕주 할아버지와 꽃순이" 동화책을 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경화동 뒤편의 장복산에는 '덕주봉'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이인 김덕주가 살았다는 곳입니다. 2014년 장복산 누리길을 창원시가 추진하면서 자연훼손 논란을 줄러 일으키기도 했던 곳입니다. 덕주봉을 전망대로 만들면 덕주봉이 완전히 가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고, 이곳을 산책로로 만들다보니 주변 바위에 못을 박는 등 자연훼손 논란이 었있던 곳입니다. - 전망대가 덕주봉을 가린다는 지적이 일었던 등산로 테크- 경화동에는 벚꽃으로 유명한 경화역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산행객이 거치는 덕주봉, 그리고 경화역 뒤편의 덕주공원도 있기에 더욱 경화동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의성 농우회, 신사참배 거부. 주기철웅천에 가면 "주시철 목사 기념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기철' 이란 인물을 연상하면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성직자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오래전에 주기철 영화를 보셨다면 그 곳에 나타난 대부분의 내용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모진 고문을 당하다 끝내 숨을 거둔 장면입니다. 이 당시 대부분 기독교계는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허용하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끝까지 자기 신념을 지키고 싸웠으니 그것 자체만으로도 존경을 받아야 할 분입니다. 하지만 너무 신사참배 거부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진정한 주기철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진해 웅천에서 태어나 웅천교회를 어릴 때 다닌 관계로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고향인 진해 웅천에 세워졌습니다. 항간에는 북한에 있는 주기철 목사의 유해를 송환해 고향에 묻어야 한다는 말도 있던데, 주기철 목사 자신이 평양에 묻어달라는 유언이 있었기에 이는 합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기념관을 가보면 대부분 신사참배 거부, 신앙생활 등에 집중되어 있는데, 과연 이것만이 전부일까요? 일제시대 기독교는 독립운동사에서 상당부분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계기도 당시 교회들이 연락책이 되었기에,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계몽운동 등의 다양한 교육을 통해 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 교회였습니다. 신앙생활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때로는 민족주의자, 계몽가 등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정주의 오산학교를 졸업하였는 데, 이 당시 조만식, 이승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습니다. 이 후 안질로 인해 시력이 약화돼 고향인 웅천에 내려왔고,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당시 웅천 20인 지도부의 일원이었으니, 일제의 지명수배를 받게 되어 피하였지만 결국, 체포되었는 데, 이것이 1차로 투옥된 시기입니다. 이후 주기철은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부산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1931-1936)를 거쳐 평양 산정현 교회(1936-1944)를 시무하였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기가 바로 평양 산정현 교회의 시기입니다. 주기철 목사가 2차로 투옥된 계기가 된 사건은 바로 의성 농우회 사건입니다. 농우회는 유재기 목사가 주도적인 인물로 '예수촌' 건설을 농촌 운동의 목표로 삼고 협동조합 운동을 실천하여 자립하는 농촌 공동체를 일구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농우회는 당시 장로교 총회에서 농촌부를 폐지하여 농우회의 와해를 꾀했으며, 일제도 유재기를 비롯하여 박학전, 송영길 등과 함께 주기철 목사도 검거하였습니다. 농우회 사건은 일제가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도모한다고 의심하여 대대적으로 탄압한 사건이며, 주기철 목사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것만으로 보아 그의 사상적 특징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일제는 1935년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기독교계의 반발을 샀으나, 탄압이 지속되면서 천주교는 1936년에 감리교와 장로교는 1938년에 국민의례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주기철 목사는 이에 저항하여, 1938년 이후 네차례에 걸쳐 5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모진 고문등으로 말미암아 1944년 4월 20일 4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주기철 목사는 1939년 7월 의성 농우회사건으로 검거되어 1940년 2월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온뒤, 산정현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게됩니다. '다섯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설교로 그의 심정을 고스한히 담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한 지 이틀 후에 일제에 검거되고, 장로회로부터 목사직을 파면당했습니다. 한마디로 주기철 목사는 일제 뿐만이 아니라 그를 지켜주어야 할 예수교 장로회로부터도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의성 농우회의 협동조합운동 문제와 남들처럼 적당히 국민의례로 타협하면 되는 데, 그것을 주기철 목사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국민의례는 과연 괜찮은 것일까요. 만약 국가가 불의의 세력이라면 거기에 충성을 다한다고 맹세해도 되는 것인가요. 이 문제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독재정권 시절에 어렸을 때 부터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 등을 많이 해 오며 살아왔습니다. 이적은 정당화할 수 있는 지 의문입니다. 충성을 맹세하는 식이 국민의례가 어떤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일제시대 교회는 단순히 예배만 보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회운동과 계몽운동의 바탕이 되었기에, 그 영향력은 상당하였습니다. 왜 일제가 주기철 목사에 집착하였을까? 그것은 그 파급력 때문일 것입니다. 불의에는 절대 굽힐 수 없다는 신념,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 생활에도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민족을 사랑한 독립운동가, 예수촌 건설이라는 공동체의 농촌 건설을 꿈꿔왔던 사회운동가, 불의한 셰력에게는 국민의례라는 형식조차도 거부하여 끝까지 신앙적 양심을 지킨 순교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설교인 '다섯종목의 나의 기도'를 보면서 당시 복잡한 심정을 느껴봅니다. 주기철 목사의 다섯종목의 나의 기도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나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바로 지금 죽음 앞에 대면하고 있기에 두려움밖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죽음이 두려워 의를 버리고 죽음을 모면하여 주님을 저버리지 않게 하옵소서 두 번째 나의 기도는 이 장기간의 고통을 이기게 하옵소서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고문이라도 한두번에 끝난다면 견딜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되는 고통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나 같은 약졸이야 주님이 도와주시기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 내 늙은 어머니와 내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인정의 줄이 얽매이지 않고 기도합니다 네 번째 나의 기도는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사람이 나라의 신민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부부가 있어서는 정절의 있가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향한 순결의 의가 있습니다 다섯 번째 나의 마지막 기도는 내 영혼을 내 주님께 부탁합니다 옥중에서는 사형장에서는 이 목숨을 끊어질 때 주님,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일본 자국민들을 위한 진해근대문화유산의 기억진해 구 도심권을 걷다보면 일제강점기때의 건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타 지역의 사례를 보면 재개발 등의 사유로 훼손되고 사라졌지만 진해에는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제의 잔재로 보이는 이 흔적들을 지우기도 싶은 심정이지만, 이 치욕적인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보존하여 후세들이 똑바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은 1909년 6월 진해만시설조사위원이 임명되어 군항건설의 계획을 본격화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1910년 1월에 '진해군항 시설지 실지답사보고서'가 제출되어 제반시설의 위치와 규모, 선정이유가 해군대신 사이코마코토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진해에 대한 계획은 1916년 4월 진해요항사령부(구 육군대학 위치)가 개청된 이후 본격화되어 1922년 비로소 진해군항계획이 완료된 것입니다. 원래 일본은 진수부급(사세보항) 군항을 설치할 계획이었으나,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많지 않아서 일본 현지에서 직공들을 이주시켜야 하는 등의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규모를 작게하고 함정의 수리를 주안점으로 삼은 군항도시가 된 것입니다. 제 1기 공사는 1910년부터 10년간 진행되었는 데, 주로 수도, 도로 등 제반시설들을 갖춘 공사였고, 도시건설에는 일본식 일자형(나가야) 목조건물을 지었습니다.(총경비 800만원으로 현재 가치는 1조 800억원 정도) 남원로타리에는 고물, 일용, 잡화, 담배 등을 취급하는 건물들이 들어섰고, 중원로타리 부근에는 의류, 도자기, 분재 그리고 북원로타리 부근에는 이들박문이 대마해전(러일전쟁)의 승리를 출하하는 글을 써서 석탑을 세웠습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리에 대해 얼마나 큰 자부심을 느끼는 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북원로타리 주변에는 곡예나 요술 등을 하는 거리와 식당 등이 있다보니 종을 치고 북을 치며 호객행위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시설들은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을 뿐 당시 이 곳에 살고 있던 한국인은 모두 경화동으로 쫓겨나간 것입니다. 한마디로 일본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위해 한국인들은 쫓겨나고 부역을 했으니, 이 모든 시설을 보는 쫓겨난 진해주민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이제 조선인을 쫓아내고 일본인들을 위해 세워진 건물들을 살펴보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진해우체국(사적291호)이 있는데, 진해라는 도시가 탄생하기 이전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우편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이후 1912년 5월에 1531평의 부지 위에 199평의 청사 건축물을 착공하여 10월 25일 준공되었습니다. 고대 유럽의 여러 건축양식을 절충한 건물로 지붕에는 반원형 채광창을 둔 건물로, 근대 건축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진해우체국은 상당히 고품격 건물이고, 상당히 큰 규모였습니다. 이 우체국은 일본인이 자국과의 우편조달을 원활히 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건물인 것입니다. 현재 선학곰탕집(등록문화재 193호)으로 운영되고 있는 건물은 1912년에 지어진 것으로 순수한 일본식 건물이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진해요항부 산하 해군병원장 사택이며, 나름대로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고 있습니다. 중원로타리 부근에는 2층 장옥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10년대 도시계획서를 보면 시가지 도로변은 2층 이상이 되어야 허가를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상점은 1층 상점, 2층 주거를 목적으로 한 건물로서 이 또한 당시 조선인에기는 주거권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과는 관련없는 건물입니다. 진해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눈에 많이 띄는 뾰족집은 1920년대 만들어진 팔층누각집입니다. 본래는 중원로타리를 중심으로 남과 북에 각각 1개씩 있었는 데, 1개는 사라지고 나머지 1개만 남았습니다. 군사도시이다보니 젊은 남성들이 많아 진해에는 요정과 기생이 많았다고 합니다. 요정으로 사용된 건물로 현재는 수양회관이라는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일제가 조선땅을 병참기지화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것이 철도입니다. 군수물자를 원활히 수송하고자 진해항을 잇는 진해선을 만들다보니 자연스럽게 진해역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진해역은(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192호) 옛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일제가 자국민 보호를 위한 일은 얼마나 대비를 잘 했는지 제황산 공원 입구 동굴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제황산 입구 동굴은 전시에 자국민의 대피를 위해 만든 곳으로 실제 안에 들어가면 규모도 상당히 넓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인 거주지에는 대피소도 없는데 반해 일본인 거주지에는 대피소도 마련하여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이 조선인을 내쫓고 자신들을 위한 도시로 만들기 위해 세운 건묵물들을 보았습니다. 도로, 수도, 철도 등의 사회간접자본을 설치하는 등 상당한 공을 들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잠시 조선을 점령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조선을 지배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반증입니다. 일본은 미국을 등에 업고 서서히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은 일본과 군사정보공유협정, 미MD체제 편입 등으로 군사적으로도 일본의 부하국가로 되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점점 조선 말 미국의 승인하에 일본이 조선의 지배를 한 사례가 다시 재연될 것 같은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진해에서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은 당시 살던 거주지에서 쫓겨나 황무지였던 한일거리(경화동)으로 터전을 옮겨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부역을 감당해야했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진해의 일제 근대유산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
합포해전, 진해 학개인가, 마산합포인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592년(선조 25) 5월 4일 처녀출전한 이순신이 원균(元均)과 합세하여 5월 7일 옥포(玉浦)에서 왜선을 무찌른 뒤에 같은 날 영등포(永登浦) 앞바다로 이동, 적을 경계하면서 휴식준비를 하던 중 와키사카(脇坂安治)가 이끄는 왜선 5척이 지나간다는 척후장(斥候將)의 급보를 받고 곧 추격작전을 벌여 합포해전이 전개되었다. 이 때 세력이 약한 왜선들은 황급히 합포(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2동 앞바다)로 도주하여 배를 버린 채 육지로 올라가 조총으로 대응하였고, 이순신의 지시에 따른 우척후장 김완(金浣), 중위장 이순신(李純信), 중부장 어영담(魚泳譚)을 비롯한 장령들이 총통과 화살로써 5척을 모두 불태워버렸으나 왜병들은 다 잡지 못하고 밤중에 남포(藍浦) 앞바다로 이동하였다. 이 해전은 불과 5척의 왜선을 상대한 것이지만 이순신의 철저한 경계로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 왜선들이 합포, 즉 마산합포구 산호2동 앞바다로 도주하여 이루어진 이순신 장군의 해전기록인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창워문화대전을 보면 마산합포구 산호2동이 아닌 진해구 풍호동 학개로 나와 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끈 판옥선 24척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판옥선 4척이 합동으로 전투를 벌여 옥포 해전을 승리로 이끈 후 영등포 앞 바다에서 머물러 있던 중 하오 4시쯤 왜선 5척을 발견했다는 척후장의 보고에 따라 이를 쫓아가 웅천 땅 합포[현재의 진해 풍호동 학개]에 이르러 왜선 5척을 모두 분멸시킨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는 전라좌수군만이 전투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도대체 어떤 것이 사실일까? 이 논란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합포해전은 지명에 대한 3개의 주앙이 있다. 마산합포구 산호동 이라는 설, 성산구 귀산동의 두산중공업 터라는 설, 마지막으로 진해구 풍호동의 학개마을이라는 설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기록한 ‘임진장초’의 기록을 보면 1592년 음력 5월 7일(양력 6월16일) 오후 신시(3-5시) 영등포(거제시 장목면)에서 왜군을 추격해 웅천땅 합포에서 왜선 5척을 격침했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그러다보니 웅천이라는 지명이 있고, 이순신 함대가 오후 4시쯤 출발해서 (시속 6킬로) 해질녁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진해구 학개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에 근거하여 김태호 전 경남도지사 재임시절에 전국의 역사학자들과 경남의 시군단체장이 참여한 ‘21세기 이순신연구회’의 토론 끝에 합포해전지를 ‘진해 학개’로 정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진해에는 합포라는 지명이 없었으며, 마산에는 합포라는 지명이 있었다. 또한 진해구 학개는 ‘원포’라고 명시돼 있어 마산 합포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에 반해 진해 학개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당시 진해의 학개마을에 포구가 있었고, 이 포구를 ‘학포’라고 했을 것이기에 학포를 합포로 불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반대측에서는 학포와 합포는 한자상 엄연히 다르기에 논리상 맞지 않다고 맞서고 있는 것이다. 이 논란이 일어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이순신 장군이 지명을 혼동하여 표기했다고 밖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마산 합포를 웅천 합포로 혼동해을 수도 있고, 진해 웅천 학개마을을 마산 합포로 혼동했을 수도 있다. 또한 시간 문제이다. 당시 문헌엔 신시(오후3-5시)로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확이 몇 시에 출발했는지도 알 수 없으며, 당시 해가 가장 긴 절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신시’라는 시각의 개념도 정확히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있다. 즉, 출발 시점의 시각을 정확히 추산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학자들 나름대로의 논리가 서로 대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창원시는 진해구 학개마을에 합포해전 기념비 및 안내판을 6년전에 세웠기에 돌이키기도 어려운 처지이다. 마산 합포라는 주장의 명백한 근거가 있어야 합포해전지가 마산 산호동이라고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미 400여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명확한 근거를 찾기란 어렵기에 기념비 장소가 변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향토문화대백과 사전은 마산 합포로 소개할 것이고, 경남을 비롯한 창원은 진해 학개로 소개할 것이다. 앞으로도 합포해전이 벌어졌던 곳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각각의 근거에 따라 합포해전지를 추측 할 것으로 전망된다. [Daum백과] 합포해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창원시티투어버스, 요금 내리고 디자인 올렸다이용료 성인 5000원→3000원, 청소년 이하 3000원→2000원 창원시(시장 허성무)는 도심 관광 상품인 시티투어버스 요금을 인하하고 버스 외관을 새로 단장했다고 7일 밝혔다. 시는 관광객이 주요 관광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지난 2017년 2층 버스 2대를 도입, 올해 새로 구입한 1층 버스까지 모두 3대의 시티투어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번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관광객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자 시티투어버스 이용료를 인하했다. 성인은 기존 5000원에서 3000원으로, 청소년 이하 및 수급자·장애인·유공자·경로우대 등은 3000원에서 2000원으로 낮췄다. 아울러 2층 버스 외관을 창원의 집, 용지호수 무빙보트, 마산어시장, 진해루 등 지역 대표 관광지 이미지로 새롭게 단장했다. 2층 버스는 스포츠파크 만남의광장에서 출발해 창원중앙역, 용지호수, 창원의 집, 시티세븐, 마산상상길, 마산어시장, 경남대학교, 제황산공원, 속천항, 진해루를 순환한다. 별도 예약 없이 시티투어버스 정류장에서 탑승하면 된다. 1층 버스는 성주사, 진해해양공원, 진해중앙시장, 제황산공원, 창원수목원을 운행하며 창원시설공단(☎ 712-0777)으로 사전 예약해야 한다.운행 시간 등 자세한 내용은 창원시티투어버스 홈페이지(changwoncitytour.com)를 참고하면 된다
-
김성호 해양항만수산국장,‘창원시 해양레포츠센터’ 현장 방문김성호 창원시 해양항만수산국장은 6일 창원시 해양레포츠센터를 찾아 현재 운영중인 해양레저스포츠 교육프로그램과 해양레포츠클럽육성 프로그램 등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해양레포츠센터 점검 시 센터의 문제점과 추진방향을 제시하고, 특히 코로나19에 따른 센터 방역수칙 준수 및 교육생들의 체온 측정 등 교육 중 발생할 수 있는 코로나19 감염 방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주문했다. 창원시 해양레포츠센터는 현재 창원시설공단이 위탁운영중에 있으며, 입주 단체로는 해양레저 안전사고 발생 시 투입가능한 민간 구조단체인 (사)한국해양구조협회 창원지부와 레저기구(모터보트, 크루저요트, 수상오바이 등)를 조종할 때 필요한 동력수상레저기구 조종면허 등을 교육시키는 (사)한국수상레저안전협회, 올림픽 종목 중에 하나인 딩기요트 등을 육성하고 활성화시키는 창원시 요트협회 가 입주해 있다. 창원시 해양레포츠센터는 국내 단일 장소 및 건물에 해양레포츠의 기초교육, 해양구조, 조종면허취득까지 국내 유일한 원스톱 시스템이 가능한 장소이다. 또한 센터에서는 해양레포츠 체험 및 해양레포츠 클럽을 육성하기 위한 국비프로그램 및 시비 프로그램을 매년 운영중에 있으며,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하여 7월부터 진해(진해구 천자로 160)와 마산(마산합포구 돝섬1길 187)에서 현재운영 중에 있다. 김성호 해양항만수산국장은 “해양레포츠관련 다양한 프로그램운영과 행사개최, 기반시설확충, 관련교육 등이 시민들이 삶의 질 향상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며, 또한 2023년에 준공 예정인 레저선박산업단지조성도 지역경제 및 해양레포츠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창원시,‘시니어 꿈꾸는 여행자 교육 과정’수강생 모집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양우, 이하 문체부)가 주최하고, 한국관광협회중앙회(회장 윤영호, 이하 중앙회)가 주관하는 60세 이상 활동적인 시니어들의 여행문화 교육 프로그램 ‘꿈꾸는 여행자 과정’이 오는 9월 둘째 주부터 창원에서 7주간 운영된다. 이번 과정은 창원시(시장 허성무)가 후원하고, 글로벌 여가 플랫폼 야놀자 여행대학(대표 유덕수)이 운영한다.교육은 ▲함께하는 여행자 ▲기록하는 여행자 ▲공유하는 여행자▲계획하는 여행자 ▲스마트한 여행자 ▲개발하는 여행자 ▲시작하는 여행자라는 교육 컨셉으로 구성하여 여행전문가의 이론 강의와 실시간 멘토링, 그룹 토의 등을 통해 실질적인 여행계획 수립과 실행으로 진행되며, 시니어 간 상호 원활한 여행정보 교류를 돕는다.강사진으로는 은퇴 후 마을버스로 국내와 세계를 여행한 임택 여행작가를 비롯해 이종원 한국여행작가협회 감사, 오재철 사진작가, 김은지 크리에이터, 박무진 뮤지컬 배우, 정상근 여행대학 총장 등 각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하여 시니어가 주도적으로 주제를 정하여 국내여행을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참가 자격은 60세 이상(1961년생 포함)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으며, 8월 6일부터 19일 오후 5시까지 꿈꾸는 여행자 홈페이지(https://seniordream.org)에서 신청할 수 있다. 지원동기, 참여의지 등을 심사해 총 30명을 선발한다. 선발자는 8월 31일 오후 5시, 홈페이지에 게시된다. 꿈꾸는 여행자 창원 과정은 9월 8일 개강하여 매주 화요일, 7주간 진행될 예정이다. 수강료는 전액 무료다 지난 2018년 서울 지역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꿈꾸는 여행자 과정은 국내 최초로 60세 이상 시니어의 주체적인 국내여행을 독려하는 여행문화 교육 프로그램이다. 올해는 서울과 창원을 비롯해 총 8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윤영호 한국관광협회중앙회 회장은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시니어계층은 국내 관광산업의 성‧비수기 불균형을 타개할 수 있는 여행수요자”라며 “이번 프로그램이 국내여행의 매력을 높이고, 사계절 국내관광 활성화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일제 진해의 공창시설, 유곽이야기진해 관광에 대한 책자를 보면 다른 것은 다 보이는 데, 유곽에 대한 건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유곽의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곽도 하나의 역사이기에 알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유곽은 관의 허가를 받아 공창들을 일정구역안에 집단적으로 거주시킨 장소를 말합니다. 과거 조선에서는 기생, 축첩 등의 성욕 충족 등의 보조제도는 있었지만, 유교 등의 영향으로 엄격한 도덕을 강조하기에 유곽처럼 집단적으로 모인 공창기구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처음으로 유곽을 공인했고, 메이저 정부하에서도 사회통제의 수단으로 존재해 왔는 데, 1930년에는 511개의 유관에 5만여명의 공창 여성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1881년 부산에서 가장 먼저 영사관령으로 공창제 운영에 관한 법규인 「대좌부 영업 규칙(貸座敷營業規則)」과 「예·창기 취체 규칙(藝·娼妓取締規則)」을 만들어 거류지 일본인에 대해 적용하였다습니다 이는 서울과 그에 인접한 인천에 비해 매우 일찍 공식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그 목적은 성병 관리와 세금 징수 등에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전체에 통일적으로 적용되는 관리 규정으로 경무총감부령 제4호 「대좌부 창기 취체 규칙(貸座敷娼妓取締規則)」[1916년 3월]이 발표된 이후 조선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일본 근대 공창제는 침략 전쟁과 함께 식민지 등지로 확산되었는데, 군인 및 일본인 사회에 성병 확산을 염려하여 정기적 성병 검사가 엄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성병 검사는 창기만이 아니라 예기, 작부 등으로도 확산되었으나 남성은 늘 검사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남성중심사회의 면모를 볼 수 있음) 조선에서 처음 검사가 시행될 때 매우 폭력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상 여성들의 강력한 저항에 봉착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보건 상의 목적뿐만 아니라 치안 유지 차원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공창제는 1947년 7월 미군정청의 공창폐지령에 따라 공창제가 폐지되었습니다. "진해 유곽의 역사는 시가계획에 따라 연작정, 현재의 충의동에 획정되었다고 합니다. 연작정은 진해와 창원을 있는 기차역인 진해역에서 동남쪽으로 10정 정도 떨어진 곳으로 12곳의 유곽이 있었다고 합니다. 접대부는 70명 정도였으며, 이 중 50여 명이 일본 구마모토현과 나가사키현의 여성들이었고, 20명은 조선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기생과 접대부를 동시에 겸하는 이매감찰로 1시간에 2원, 1박에는 7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요리집의 하루 매상이 6원에서 10원 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 이용대상자는 당시 신시가지 공사와 마천수원지 공사장의 노동자가 2천여명 이상이 됨에 따라 매춘부들이 모여들게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유곽을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였고, 1930년 '일본유람사'는 아예<전국유곽안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유곽을 관광상품화 하였다고 합니다. 즉 철도역이 있는 곳과 일본인 거류지가 있는 곳이 유곽여행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진해에 있던 유곽의 이름은 녹도루, 취월루, 금시루, 옥천루, 청천루, 진해루 등이 있었으며, 이러한 유곽은 현재는 모두 개축되어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일제강점기 진해지역 일본인 생활상/ 창원대 김선희 석사논문)" (위 내용을 보면 현재 진해루라는 곳이 있는 데, 다소 명칭이 부적절하지 않나 싶습니다. 진해지역민들의 쉼터로 가장 많이 활용되는 곳이 유곽의 이름과 동일하니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근거를 중심으로 허정도 박사님이 찾아낸 유곽을 살펴보겠습니다. (출처: 허정도의 도시이야기) ● 외관모습1 : 4채의 집이 나란히 붙어있는 전형적인 일본식 나가야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 나가야 형태: 여러 세대가 나란히 이어져 있으면서 외벽을 공유하는 건물, 또는 긴 하나의 건물을 수평으로 구분하여 각각에 출입문을 만든 형식의 주택을 말합니다) ● 외관모습2 : 각 주호당 1개의 현관을 가지고 있으며, 현관의 개별 수리에 의해 각양각색이지만 2층 판벽에 의한 외벽마감과 창호는 훼손되지 않고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 외벽모습 : 2층 지붕과 1층 처마지붕기와는 최근에 보수되어 있습니다. - 좌측의 집은 1층 외벽마감이 적벽돌로 보수공사를 하여 인접가구와 다른 모습입니다. - 2창호의 덧문이 각각 다른모습입니다. 판재, 철판을 오려 붙인 모양이 이채롭습니다. 2층 상단의 목재가구와 회벽칠(지금은 페인트 마감) 부분은 원형 그대로입니다. - 2층 외벽은 비늘 목재판벽 마감이 잘 살려져 있으나, 1층 부분은 제각각 적벽돌, 시멘트 모르터, 페인트 마감등으로 되어 있지만, 본래의 원형을 쉽게 연상할 수 있습니다. - 특히 우측에 면한 가구는 2층 목제 창호와 난간살 등이 원형 그대로 인 듯 합니다. 충의동,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에 가면 이런 집을 아마도 보았을 것입니다. 이 건물은 일제시대에 청루라고 하었는데, 해방후 불하를 받아서 주택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근대건축물을 보존하는 이유는 당시의 생활상과 역사를 알기 위함입니다. 유곽이 다소 이미지가 좋지 않다고 하여 방치하거나 없앨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이러한 근대 건축물을 창원시가 매입하여, 보존하고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노력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
빼앗긴 자들의 격리구역, 경화동경화동은 1910년 이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동네이름은 없었고, 이 지역을 한일거리라 칭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한'은 넓고 크다라는 의미가 있고, '일'은 제일이라는 뜻이 있으니 미래에는 아마도 큰 쓰임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있어서 한일거리라 불린 듯 합니다. 그리고 포스코 아파트가 있는 경화역 위 부분은 조천리라고 당시에 불렀습니다. 지금 이곳을 신주소로 보면 조천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910년 6월부터 일본은 진해에 군항은 건설하였고, 한일거리에 직교형 도시를 건설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일거리를 줌심으로 서부지역(현동, 도만리, 도천리, 여명리, 중평리, 좌천리, 신좌천리, 안곡리, 속천리) 9개마을과 공부지역(하구, 중동) 2개마을의 주민들, 총 390여가구 2,000여명의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냅니다. 바로 일제로부터 쫓겨난 조선인들을 당시 황무지 땅인 한일거리에 수용하였고, 이때부터 '한일거리'가 '경화동'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경화동은 일본식 동명이 거절하고 한국식 동명을 사용한 것으로, 慶(경사,경)和(화할 화, 화목할 화)란 이름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는 여러분들이 짐작하시기를 바랍니다 (직교형으로 이루어진 경화동) 당시 조선인들을 쫓아내고 화려하게 등장한 진해신도시와는 달리 일본군부에 의해 졸지에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고, 수용당한 조선인들의 신도시가 경화동이었으니, 이들의 나라잃은 설움이 얼마나 심했을지는 이루 표현하기 힘들 것입니다. 물론 따을 빼앗기지 않을려고 저항도 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 군부의 강한 총칼앞에 조선인들의 대항은 역부족이었습니다. 1910년 1월에 일본군부에 진해만시설조사위원회가 제출한 '진해군항시설지 실지답사보고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이 보고서의 한국인 처리 기록을 보면 "한국인을 일본인등과 함께 살게 하는 것은 위생 등의 문제로 불가하다. 격리하는 것이 맞다. 격리시킬 위치는 신시가지 서쪽 덕산방면이 좋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문건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일본인은 한국인을 더럽고 불결한 존재로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보고서대로 한국인들은 덕산에 수용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진해 신시가지와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조선인 거주지를 만들면 신도시 조성과정에 필요한 노동력 공급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즉, 덕산동은 다소 거리가 있기에 걸어서 신시가지에 이르는 데, 다소 멀기 때문입니다. 도보를 통해 신시가지에 이르는 데, 적절한 곳이 경화동이었기에 최종 결정 때 덕산동에서 경화동으로 변경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경화동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삶의 터전도 빼앗겨 먹고 살기도 힘든 고통 속에 있는데, 여기에 더해 일본의 군부도시인 진해신시가지 공사에 강제부역을 해야 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1907년 3월부터 일제는 마을을 철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일본도 강제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명분이 필요했기에 나름대로 보상책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값싼 보상으로 인한 한국인들의 불만 폭발을 우려하여 삼엄한 감시 속에 비밀리에 보상이 이루어졌습니다. 사실상 헐값으로 한국인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기에 빼앗겼다는 것이 적당한 표현일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조선인들의 반발이 있었습니다. 1905년에는 '도만이'라는 조선인이 개(도만포)부근에서 측량하던 일본해군을 쫓아내기도 하였고, 1906년에는 토지보상비를 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1910년에는 한국인 소유의 삼림을 잡아 먹을려는 마산 부윤의 아들의 횡포를 둘리(석동)마을의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막아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일시적으로 막아낸 것일 뿐, 이들은 후에 목숨을 잃기도 하고 큰 불행이 닥쳐올 것은 자명한 일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힘없는 조선인들이 일본군부의 총칼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11개마을의 2천여명 주민들은 당시 일본군부가 준비해 좋은 진해신시가지 동쪽 2.5킬로 떨어진 한일거리라 불렸던 황무지 벌판에 강제로 집단이주를 당하였습니다. 일본군은 가구당 45평으로 이루어진 택지를 조선인에게 주었고, 4미터 내외 좁은도로의 격자형으로 조선인들을 배치하였습니다. 위 배치과정에서 길 중간중간에 소방목적으로 7개의 공터를 일본군은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 공터가 후에 일본군의 비행장 건설로 열지 못하게 된 풍호동의 '풍덕개장'이 옮겨와 매 3일과 8일에 열리는 5일장 장터로 사용되었는 데, 오늘날 경화시장의 시초가 된 장터입니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1번은 나무전, 2번은 8일 싸전, 3번은 3일 일용잡화, 4번은 8일 일용잡화, 5번은 3일 고기전, 6번은 3일 싸전, 7번은 8일 고기전이 열렸습니다. 즉, 일제 시데에는 3일과 8일에 7군데서 분산하여 장이 열렸지만, 지금은 3일과 8일에 통합해서 운용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제시대 때 경화시장으로 사용된 시장부지는 현재 주민들의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식민지 도시는 지배지와 피지배자의 공간이 격리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하지만 지배자만의 도시를 만들기 위해 주민을 내쫓아 별도의 수용지를 만든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또한 위생문제로 격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치안문제로 격리를 했을 것이며, 보다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교육에 있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차별화하는 일본의 '내선별학' 이라는 통치원리에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군사기밀이 필요한 군사도시라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에서 2차대전시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한 후 유대인들을 강제로 연행하여, 지정된 구역으로 가두어 두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곳을 '게토'라고 하는 데, 바로 일본군부가 세운 게토가 경화동인 셈인 것입니다. 이렇듯 경화동은 삶의 터전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빼앗긴 자들이 격리되어 살던 빼앗긴 자들의 구역이었습니다. 또한 일제가 자신들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적절한 거리에 둠으로써 조선인들의 노동력 착취를 위해 만든 구역이 경화동인 것입니다. 빼앗긴 자들의 처절한 삶과 한이 묻어 있는 곳인, 경화동, 일제강점기 처절한 삶의 현장이 바로 경화동입이다. 이 경화동의 의미를 되살리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경화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현재 살고 있는 우리 후손들의 책무가 아닐까요. '빼앗긴 자들의 구역' 경화동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