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창원시 독립운동가 주기철목사 기념관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지정▶ 정부지원금 확인하기 창원시(시장 허성무)는 항일 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를 기리는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지난 1일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됐다고 9일 밝혔다.주기철 목사 기념관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항일운동을 펼치다 옥중에서 순국하신 주기철 목사(1897~1944)를 기리기 위해 지난 2015년 3월 그의 고향인 웅천 지역(진해구 웅천동로 174)에 개관했다.1층에는 전시시설과 영상실, 2층에는 전시실과 자료실 등을 갖췄다. 주 목사의 생애 소개를 비롯해 그가 몸담았던 교회에서 보관하던 유품 100여 점, 순국하기 전 입었던 한복, 생전 사진 등이 전시돼있다.국가보훈처가 지정하는 현충시설은 국가유공자의 공훈 및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건축물·조형물·사적지 중 국민의 애국심을 기르는 데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시설이다.시는 주기철 목사 기념관의 현충시설 지정을 계기로 입구에 현충시설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하는 한편 시설을 지속적으로 점검 및 보강하는 등 활성화에 만전을 기할 방침이다.안익태 창원시 관광과장은 “일본의 신사참배에 항거한 주기철 목사님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은 우리 지역 대표 독립운동가 중 한 분인데, 이제라도 이분을 기리는 시설이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다행스럽다”며 “목사님의 숭고한 정신에 누가 되지 않도록 기념 시설 관리 및 홍보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정부 환급금 조회하기 -
진해구민 '이이효재' 기리는 길 조성한다.창원시가 지난 2일 정혜란 창원시2부시장 주재로 “효재의길‘조성을 위한 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간담회회에는 김윤자 진해여성의전화 대표, 이경민 진해경신재단 이사장, 이종화 창원시의원 김경영 경남도의원, 강인순 경남대 명예교수, 황창호 MBC 경남 피디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효재의길‘은 사업기획부터 완료까지 만관협력 및 성인지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창원시 여성선구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여성테마거리로 조성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사진 : 창원시) 그런데 이날 간담회가 아쉬운 점이 있다. ‘효재의길’ 위치를 마산에 두느냐 진해에 두느냐눈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의견이 진해에 두는 것이 맞다는 의견이기에 진해로 두는 것으로 결정됐지만, 출생지를 따져서 마산이야기가 나온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이이효재 선생은 비록 마산에서 태어났지만 퇴임이후 진해에서 다양한 운동을 펼쳤고, 진해에서 일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당연히 진해구민으로서 마지막을 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진해에 조성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기에 이 위치문제를 논의한 것 자체가 부적절한 것이다.▶ 정부지원금 확인하기 창원시는 물론이고 진해구도 원주민과 이주민이 함께 살아가고 있고, 엄연히 똑같은 창원시민이며 진해구민이다. 출신으로 따지는 것은 창원시의 인구증가를 위한 시책에도 맞지 않으며, 진해로 이주한 시민들은 이 문제가 논의되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쾌할 수 있는 것이다. 약 10여년 전에 진해가 고향인 주기철 목사의 유해가 현재 묵한 평양에 묻혀 있는 데, 고향인 진해로 옮기는 운동을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북한이 주기철 목사의 시신을 내어주지도 않겠지만, 주기철 목사 스스로가 평양에 묻히겠다고 유언을 한 마당에 진해로 옮기자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또한 주기철 목사가 평양에서 일생을 마감했으면 평양사람이지, 진해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이상 출신논리로 접근하는 것을 하지 말아 달라는 의견이 많았다. 일부 언론에서 고 이이효재 선생이 마산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고향이 마산이고, 진해라서 마산구민, 진해구민이 아니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 그 지역주민인 것이다. 이이효재 선생은 진해에 거주한 진해구민이다. 따라서 마산출신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진해구민 이이효재 선생을 강조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이러한 의식이 정착되어야 지역감정이니, 출신으로 따지는 ‘지연’ 등의 해묵은 병폐를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정부 환급금 조회하기 -
의성 농우회, 신사참배 거부. 주기철웅천에 가면 "주시철 목사 기념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기철' 이란 인물을 연상하면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성직자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오래전에 주기철 영화를 보셨다면 그 곳에 나타난 대부분의 내용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모진 고문을 당하다 끝내 숨을 거둔 장면입니다. 이 당시 대부분 기독교계는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허용하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끝까지 자기 신념을 지키고 싸웠으니 그것 자체만으로도 존경을 받아야 할 분입니다. 하지만 너무 신사참배 거부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진정한 주기철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진해 웅천에서 태어나 웅천교회를 어릴 때 다닌 관계로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고향인 진해 웅천에 세워졌습니다. 항간에는 북한에 있는 주기철 목사의 유해를 송환해 고향에 묻어야 한다는 말도 있던데, 주기철 목사 자신이 평양에 묻어달라는 유언이 있었기에 이는 합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기념관을 가보면 대부분 신사참배 거부, 신앙생활 등에 집중되어 있는데, 과연 이것만이 전부일까요? 일제시대 기독교는 독립운동사에서 상당부분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계기도 당시 교회들이 연락책이 되었기에,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계몽운동 등의 다양한 교육을 통해 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 교회였습니다. 신앙생활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때로는 민족주의자, 계몽가 등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정주의 오산학교를 졸업하였는 데, 이 당시 조만식, 이승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습니다. 이 후 안질로 인해 시력이 약화돼 고향인 웅천에 내려왔고,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당시 웅천 20인 지도부의 일원이었으니, 일제의 지명수배를 받게 되어 피하였지만 결국, 체포되었는 데, 이것이 1차로 투옥된 시기입니다. 이후 주기철은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부산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1931-1936)를 거쳐 평양 산정현 교회(1936-1944)를 시무하였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기가 바로 평양 산정현 교회의 시기입니다. 주기철 목사가 2차로 투옥된 계기가 된 사건은 바로 의성 농우회 사건입니다. 농우회는 유재기 목사가 주도적인 인물로 '예수촌' 건설을 농촌 운동의 목표로 삼고 협동조합 운동을 실천하여 자립하는 농촌 공동체를 일구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농우회는 당시 장로교 총회에서 농촌부를 폐지하여 농우회의 와해를 꾀했으며, 일제도 유재기를 비롯하여 박학전, 송영길 등과 함께 주기철 목사도 검거하였습니다. 농우회 사건은 일제가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도모한다고 의심하여 대대적으로 탄압한 사건이며, 주기철 목사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것만으로 보아 그의 사상적 특징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일제는 1935년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기독교계의 반발을 샀으나, 탄압이 지속되면서 천주교는 1936년에 감리교와 장로교는 1938년에 국민의례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주기철 목사는 이에 저항하여, 1938년 이후 네차례에 걸쳐 5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모진 고문등으로 말미암아 1944년 4월 20일 4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주기철 목사는 1939년 7월 의성 농우회사건으로 검거되어 1940년 2월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온뒤, 산정현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게됩니다. '다섯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설교로 그의 심정을 고스한히 담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한 지 이틀 후에 일제에 검거되고, 장로회로부터 목사직을 파면당했습니다. 한마디로 주기철 목사는 일제 뿐만이 아니라 그를 지켜주어야 할 예수교 장로회로부터도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의성 농우회의 협동조합운동 문제와 남들처럼 적당히 국민의례로 타협하면 되는 데, 그것을 주기철 목사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국민의례는 과연 괜찮은 것일까요. 만약 국가가 불의의 세력이라면 거기에 충성을 다한다고 맹세해도 되는 것인가요. 이 문제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독재정권 시절에 어렸을 때 부터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 등을 많이 해 오며 살아왔습니다. 이적은 정당화할 수 있는 지 의문입니다. 충성을 맹세하는 식이 국민의례가 어떤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일제시대 교회는 단순히 예배만 보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회운동과 계몽운동의 바탕이 되었기에, 그 영향력은 상당하였습니다. 왜 일제가 주기철 목사에 집착하였을까? 그것은 그 파급력 때문일 것입니다. 불의에는 절대 굽힐 수 없다는 신념,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 생활에도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민족을 사랑한 독립운동가, 예수촌 건설이라는 공동체의 농촌 건설을 꿈꿔왔던 사회운동가, 불의한 셰력에게는 국민의례라는 형식조차도 거부하여 끝까지 신앙적 양심을 지킨 순교자입니다.▶ 정부지원금 확인하기 마지막으로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설교인 '다섯종목의 나의 기도'를 보면서 당시 복잡한 심정을 느껴봅니다. 주기철 목사의 다섯종목의 나의 기도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나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바로 지금 죽음 앞에 대면하고 있기에 두려움밖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죽음이 두려워 의를 버리고 죽음을 모면하여 주님을 저버리지 않게 하옵소서 두 번째 나의 기도는 이 장기간의 고통을 이기게 하옵소서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고문이라도 한두번에 끝난다면 견딜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되는 고통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나 같은 약졸이야 주님이 도와주시기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 내 늙은 어머니와 내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인정의 줄이 얽매이지 않고 기도합니다 네 번째 나의 기도는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사람이 나라의 신민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부부가 있어서는 정절의 있가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향한 순결의 의가 있습니다 다섯 번째 나의 마지막 기도는 내 영혼을 내 주님께 부탁합니다 옥중에서는 사형장에서는 이 목숨을 끊어질 때 주님,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정부 환급금 조회하기 -
왜군 종군신부 세스페데스를 기념해야 하나진해 웅천에 가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쪽에는 왜군의 종군 신부에 불과한 세스페데스를기념하여 창원시가 시민의 세금으로 공원을 조성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또한 항일독립운동가였던 주기철 목사의 기념관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세스페데스는 조선땅에 최초로 발을 디딘 서양선교사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천주교도였던 왜장 고니시유키나가의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로서 조선인을 상대한 것이 아니라, 왜군을 상대한 신부입니다. 한마디로 전시 왜군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종군신부입니다. 이는 조선의 관점에서 왜군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임화가 '신문학사'에서 세스페데스는 '서구의 사정과 천주교의를 전했다고는 하나 이렇다할 흔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즉, 조선을 위한 세스페데스의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스페데스가 고니시에게 보낸 편지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 다음 날 저를 방문해 성 안에서 만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그(고니시 유키나가)에게 편지들을 전했습니다. 그는 편지를 읽고 나서 제가 조선에 도착한 사실에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대화를 나눴습니다. 또한 여러 성으로부터 많은 일본군 이교도가 자기를 방문하고자 이곳에 자주 출입하기 때문에 자기 동맹자들의 저택과 거처가 있는 이곳 성의 낮은 곳에 제가 머무르는 것이 그리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비센테 베에몬과 함께 성의 높은 곳에 머무르면서 가톨릭교도들이 그곳으로 저를 방문하게 하고 고해하도록 했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임진란의 기록』 이 편지의 뜻대로 세스페데스는 비센테 베에몬과 같은 높은성, 바로 웅천왜성에 머물렀습니다. 일본군 이교도들의 방문을 위해 웅천왜성에 거주하였는데, 과연 조선인들을 만나 선교활동을 했다는 주장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정부지원금 확인하기 실제로 세스페데스의 편지가운데 조선에 관한 언급은 그리 없으며, 있다고 한들 조선은 매우 춥다거나 일분의 카톨릭교도들이 굶주림, 질병 등으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단지 조선인에 관한 것은 포로로 끌려온 조선 병사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내용인데, 이를 과대해석해서 마치 조선을 위해 공헌한 신부로 칭송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스페데스가 1년 6개월동안 조선에서 활동했던 시기는 웅천왜성을 봉쇄했던 시기이기에 조선인을 만나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스페데스의 편지를 수록한 루이스 프로이스(1532~1597)의 '일본사'에도 이순신을 “조선 국왕과 가까운 친척 사이이며 해안 지대에 주둔하고 있는 장수”로 소개하거나 조선과 중국의 국경에는 넓은 모래사막이 있다는 부정확한 내용이 많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국왕은 “항복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조선군은 “해적”과 같은 행위를 한 것으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즉, 세스페데스의 편지를 담은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도 조선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지 못한 데,세스페데스가 조선을 위해 왔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과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할 수 있었던 배경에 외국 선교사의 지원이 상당부분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일본 큐슈의 영주 및 사무라이에게 서양식 화승총을 전달한 이도 스페인 예수회 소속 프란시스 사비에르 선교사였습니다. 영주와 사무라이들에게 손쉽게 전투에 승리하게 해주고, 인심을 얻어 세례를 베풀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큐슈지방의 영주인 고니시 유키나가였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스페인 선교사들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대면하게 하였다는 것 자체가 도요토미에게유리한 지형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임진왜란때 고니시는 선봉대였던 1군단의 수장이었고, 부산 동래 상륙시에는 군선에 둥근원형의 십자가 마크를 새긴 군기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부대원 전원이 카톨릭 세례를 받은 신자들로 구성되었고, 그 뒤에 세스페데스 일행의 종군신부가 뒤따랐다고 합니다. 즉, 세스페데스가 임진왜란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입니다. 진해지역에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기념비 등이 많으며, 안골포 해전으로 왜군을 격퇴한 사실도 있습니다. 또한 세스페데스 공원 맞은 편에는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의 기념관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스페데스 공원이 웅천에 있는 것은 선조들의 노고를 비웃는 처사가 아닐까요? ▶ 정부 환급금 조회하기
